프랑스의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는 1819년 작품 〈메두사호의 침몰>을 통해 단순한 조난 사건을 넘어, 국가와 권력, 인간의 존엄에 대한 거대한 질문을 던졌다. 무책임한 리더십이 초래한 선박의 참사, 그리고 그로 인해 희생된 다수의 생명은 제리코의 화폭 위에서 ‘표류하는 프랑스’라는 상징으로 되살아났다.

이 그림은 단지 먼 나라의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림 속 현실은 오늘날 우리가 목격한 정치의 풍경과 묘하게 닮아 있다. 배가 난파했을 때, 먼저 구명보트를 차지한 이들은 총독과 귀족, 소위 ‘상층부’였다. 그리고 힘없는 이들은 아무런 동력도 없는 뗏목에 올라 바다를 표류하다 거의 대부분 목숨을 잃었다. 이 뗏목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 떠 있다.

이 장면을 접하며 불현듯 최근 몇 년간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을 떠올렸다. 헌법의 가치를 수호해야 할 권력이 시민 위에 군림하고, 언론을 길들이고, 의회민주주의를 무력화하려 했던 시도들. 대통령이라는 이름 아래 진행된 그 일련의 퇴행은, 프랑스 왕정복고기의 기득권 귀족들의 횡포와도 겹쳐 보인다.

제리코가 그린 메두사호의 침몰은 단지 ‘해난 사고’가 아니라 부패한 권력의 축소판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가 외면했던 수많은 민주주의의 원칙들, 표현의 자유, 권력 분립, 시민의 목소리 하나하나가 버려진 뗏목 위의 사람들처럼 취급받고 있는 건 아닌가 되돌아보게 된다.

메두사호는 결국 침몰했다. 그 사건은 새로운 정치 인식, 새로운 시민의 각성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은 수 차례 침몰 직전까지 갔다. 그때마다 시민이 지키고 일으켜 세웠다. 우리는 여전히 뗏목 위에 있지만, 눈앞에 아르고스호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메두사호의 침몰‘ 작품의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프랑스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한 책이 있다. 「이진숙, ’시대를 훔친 미술‘ 민음사, 2015」

책 내용 일부를 옮겼다.

메두사호의 침몰: 프랑스의 침몰

1816년 7월 2일 프랑스를 출발해서 세네갈로 향하던 해군함 메두사호가 난파했다. 여기에는 세네갈 총독 슈발츠와 그 가족 그 가족 소위 ‘귀빈들’이 타고 있었다. 배가 난파한 위기의 순간 리더의 행동은 무책임했고 부도덕했다. 총독과 귀빈들은 우선 구명 보트 여섯 척에 옮겨 탔다. 나머지 선원 153명은 가로 20미처, 세로 7미터 크기의 뗏목을 만들어 나누어 탔다. 동력이 없는 뗏목은 구명보트에 묶어 끌 수밖에 없었다. 고의였는지 우연이었는지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구명보트와 뗏목을 연결하는 밧줄이 풀렸다.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수단도 갖추지 못한 선원들은 망망대해에서 십이 일간 표류했다.

테오도르 제리코〈메두사호의 침몰> 1819


13일째 되던 날 기적적으로 그들은 영국 국적의 아르고스호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열다섯 명이 생존했는데 다음 날 열 명이 더 목숨을 잃었다. 잠시 잊혔던 이 비극적인 사건은 생존자 중 한 사람이었던 선상 의사 앙리 사비니가 1816년 9월 13일 <주르날 데 데바)에 선상 일지를 게재함으로써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버려지듯 남겨진 뗏목 위에서 벌어진 일도 참혹했지만, 그 지경으로 선원들을 방치한 선장 생보르 백작의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태도는 더 끔찍했다.

1819년 낭만주의 화가 제리코가 이 사건을 거대한 화폭에 담아서 가을 살롱전에 출품했다. 제리코는 선원들이 멀리서 아르코스호를 발견하고 신호를 보내는실낱 같은 희망의 한순간을 그렸다. 출렁이는 파도에 흔들리는 뗏목 위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정도로 많이 탑승한 사람들의 필사적인 동작은 그림에 역동성을 더한다.

살아 희망을 말하는 사람, 이미 죽은 사람, 죽어가는 사람 그리고 죽은 젊은이를 무릎에 누이고 사색에 빠져 있는철학적인 인물들을 본 사람들은 이 그림을 자연히 ‘표류하는 프랑스‘에 대한 은유로 읽었다.

선장 생보르 백작이 나폴레옹 실각 이후 프랑스로 귀환한 귀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일은 단순한 선박 사고가 아니라 구귀족층의 무능력과 부패를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1814년 나폴레옹의 퇴각과 빈체제의 성립으로 프랑스에는 부르봉왕가가 다시 돌아왔다. 1815년 나폴레옹의 덧없는 백일천하가 끝난 뒤, 왕위는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에게 넘어갔다. 프랑스 혁명 기간 중 망명해 있던 그와 함께 많은 망명 귀족들도 함께 돌아왔다. 다시 권력을 잡게 된 이들은 다시 권력을 읽게 될까 봐 더욱 극성스럽게 굴었다. 비교적 온건했던 루이 18세는 입헌군주제와 몇 가지 원책들을 공약으로 내세운 뒤 준수하려고 했지만, 극력한 왕당파의 저항에 부딪히곤 했다. 루이 18세가 병으로 세상을 뜨자 또 다른 동생 샤를 10세가 권력을 이었다. 샤를 10세는 극우 왕당파와 함께 반동적인 왕정복고 운동을 시행했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지켜 낸 자유와 평등, 박애의 프랑스혁명 정신을 거부했다. 거기다 국민의 대표 기관인 의회를 해산하고 법치주의를 우선시하는 입헌주의를 반대했다. 모든 망명 귀족들의 재산을 보상하고 언론을 철저히 탄압했다. 왕당파들은 국내적 기반이 취약했음에도 이웃 국가에서 혁명 사태가 발생할 경우 공동 개입을 약속했던 빈체제에 따라 유럽의 다른 황정들을 믿었다. 제리코의 그림이 그려지던 시점은 샤를 10세의 무능력하고 부패한 리더십에 모두 치럴 떨던 참이었다. 선장이 총독 가족과 귀빈만 구명보트에 태우고, 선원들을 버리고 도망간 메두사호 사건은 국가 공동체 전체의 이익과 진보를 무시한 기득권 세력의 제밥그릇 차리기의 축소판으로 보였다.(이진숙 지음, 민음사, 시대를 훔친 미술, 273~277쪽)